도쿄 하라주쿠역을 나서면 이질적인 공기가 느껴진다. 수많은 유니클로 쇼핑백과 스벅 컵 사이로 거대한 나무 도리이(신사 입구문)가 보이기 시작한다. 수학여행 온 교복 입은 고등학생, 손잡고 걷는 연인들,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여기가 일본 '천황제 국가'의 정점이었던 메이지신궁이라는 걸, 이 중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1912년 메이지 천황 사후 일본 정부는 국가 예산으로 그를 신으로 모시는 신궁을 도쿄에 세운다. 그 이름도 '메이지신궁'. 군국주의 시기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 그루의 헌수(헌납된 나무)들이 도쿄로 실려 왔다. 신궁은 제국의 상징이자 국민 정신통일의 도구였다. 참배는 곧 충성 서약이었다. 이런 유산이 오늘날 힐링 파워 스팟으로 포장돼 유튜브 영상의 배경이 되는 상황. 한국인의 시각에서 이 간극은 불쾌할 정도로 크다.
하라주쿠 역 인근에 자리한 메이지 신궁의 본전 ⓒ 김경민 특파원
🧱 철근 없이 100년을 버틴 건축물이 상징하는 것
메이지신궁 본전은 콘크리트 하나 쓰지 않고 전통 목조건축 방식으로 지어졌다. 그 웅장한 기와와 회색 목재는 일본 건축미의 정점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건축물은 일종의 국체(國體) 선전물이기도 했다.
일본은 메이지 천황을 근대화의 상징이자 절대 권력의 정점으로 만들었다. 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바로 신궁이었다. 이 건물은 천황의 신성함을 눈앞에 구현하는 일종의 정치건축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메이지 천황은 이곳에서 신으로 존재한다.
이 건축물을 보는 것은 미학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겐 일본 근대화의 위엄일지 몰라도 한국인에게는 침략과 동화 정책, 군국주의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메이지 신궁의 산책로. 녹지로 둘러싸여 현지인은 물론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X
🏞 Z세대가 찾는 '파워 스폿'의 불편한 진실
흥미로운 건 요즘 일본 MZ세대(특히 Z세대) 사이에서 메이지신궁이 '파워 스폿(에너지를 얻는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는 점이다. 입시 전, 취업 전, 연애운 상승을 위해 신사에 참배하는 문화는 일본 전역에 걸쳐 퍼져 있지만 메이지신궁은 그중 단연 으뜸이다.
SNS에는 "메이지신궁 가서 기도했더니 바로 합격!" 같은 후기들이 넘친다. 외국인 여행객도 여기에 합류한다. 무슬림 관광객이 신궁 입구에서 인증샷을 찍고, 한국인 커플이 데이트 코스로 추천하는 블로그 글도 보인다.
하지만 그 참배가 어디를 향한 것인지, 어떤 역사를 등에 업고 있는지 묻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역사 지우기'는 때로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질감조차 사라진다. 그 점이 더 섬뜩하다.
메이지 신궁에서도 여느 신사와 마찬가지로 운세점을 보거나 부적 등을 살 수 있다 ⓒ X
🏛 역사를 비우고 현재만 소비하는 방식
일본은 전후 국가신도를 금지당했다. 전쟁에 책임 있는 제국주의 상징으로서 '천황 숭배'는 국제사회에서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이지신궁은 종교시설이 아닌 사적 공간이라는 형식을 빌어 그 존재를 유지했다. 신사 본전 옆에는 여전히 '전몰자 유족회'가 주최하는 헌화 행사가 열린다.
메이지신궁의 전시는 대부분 자연과 조화, 건축의 미학에 집중돼 있다. 전시 패널에서 조선 병합이나 대륙 침략의 역사는 삭제돼 있다. 제국주의의 상징이 아무 문제없는 문화재로 둔갑하는 순간이다.
과거를 지운 채 현재만 소비하는 방식. 일본 사회가 메이지신궁을 다루는 태도는 그들의 역사인식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메이지 신궁의 본전 마당 ⓒ 김경민 특파원
🧨 야스쿠니신사와 달리 왜 비판받지 않는가?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이 분노하는 대상은 주로 야스쿠니신사다. A급 전범이 합사되어 있다는 상징성과 현직 총리들의 반복된 참배 때문이다. 반면 메이지신궁은 비교적 국제 여론의 비판에서 자유롭다.
이는 이 신궁이 전범을 직접적으로 모신 장소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겉보기엔 평화롭고 조용한 도심 속 녹지로 기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메이지신궁 역시 근대 일본 제국주의의 토대인 메이지 천황을 신격화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제국주의 미화라는 본질은 다르지 않다.
겉으로 드러난 정치성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적 책임까지 흐려져선 안 된다. 메이지신궁의 조용한 외관이 바로 그 은폐의 메커니즘이다.
도쿄도청 전망대에서 바라본 메이지 신궁. 울창한 녹지가 인상적이다 @ 김경민 특파원
🏯 메이지 천황은 왜 일본 우익의 상징인가
메이지 천황은 일본 우익에게 있어 이상적인 일본의 원형이다. 폐번치현, 중앙집권, 근대화, 식민지 확장, 대륙 침략. 그 모든 과정을 정당화시켜주는 존재가 메이지 천황이다. 이 때문에 일본 우익 정치인이나 보수 사학계는 그를 비판 없이 국가 건설의 아버지로 치켜세운다. 메이지신궁은 그 스토리의 성지다. 전통을 소비하는 젊은 세대가 이 신궁을 '예쁜 신사', '데이트 코스'로 소비할수록 이 왜곡된 내러티브는 더 탄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