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코쿠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 있는 도고온천(道後温泉).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3000년 전부터 존재해왔다는 이 온천은 한 마리 왜가리가 다친 다리를 치유했다는 이야기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그렇다고 도고온천이 단순히 역사 유산에 머무는 공간은 아니다. 이곳은 일본 근대문학과 예술, 그리고 현대 애니메이션까지 깊숙이 연결돼 있다.
마쓰야마 도고온천본관 ⓒ X
🏯 메이지가 숨 쉰다 – 도고온천 본관
도고온천의 상징은 단연 도고온천 본관(道後温泉本館)이다. 1894년 지어진 이 3층 목조건물은 메이지 시대 특유의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건축미를 자랑한다.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이 건물은, 외형만큼이나 내부도 정교하다. '유노야(湯之屋)'라고 불리는 대욕장은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러우며 천장에는 가문 문양이 새겨진 목재가 장식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 왕족 전용 공간인 '유신덴(又新殿)'이 이 건물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메이지 천황이 실제로 머물렀던 전용 입욕실과 대기실이 복원돼 있어 일반 관람객도 당시 왕실의 입욕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현재 도고온천 본관은 2019년부터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최근 끝냈다. 운영 중 보수라는 드문 방식으로 일부 구역은 문을 닫고 나머지 공간은 계속 운영하면서 공사를 마쳤다. 보수 공사 장면마저도 도고온천만의 문화 체험으로 기획한 점이 인상 깊다. 일본 특유의 보존과 활용의 동시성을 체감할 수 있는 사례다.
도고온천본관 내 마당 ⓒ X
🎥 '센과 치히로'의 영감지
많은 한국인들이 도고온천을 알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작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애니 속 유바바의 욕탕집은 도고온천 본관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애니 제작진은 도고온천을 비롯한 여러 일본 전통 온천을 참고해 '욕탕의 미학'을 구현했다. 도고온천의 장식적인 외관, 다다미 방 구조, 계단과 복도에서 풍기는 시간의 결이 애니메이션 속 공간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애니메이션 개봉 이후 도고온천은 일본 내에서도 젊은 세대에게 다시금 조명을 받으며, 성지순례지로 부상했다. 도고온천 상점가에는 '센과 치히로' 굿즈를 파는 상점이 등장하고, 유카타 차림의 여행객들이 캐릭터 포토존 앞에서 줄지어 사진을 찍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묘사된 온천 ⓒ 스튜디오 지브리
🏮 온천 너머의 이야기 – 상점가와 문학 산책
도고온천을 찾는다면, 본관만 보고 돌아서기엔 아쉽다. 온천 본관을 중심으로 펼쳐진 도고 하온지 상점가는 전통 간식과 유카타 체험, 온천달걀, 지역 공예품이 어우러진 아기자기한 거리다. 또한 이 지역은 일본 근대문학의 거장 나쓰메 소세키가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 '도련님(坊っちゃん)'은 도고온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금도 온천 마을 곳곳에는 작품 속 인물들을 형상화한 동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도고온천 전철역 앞에는 소세키의 흉상과 '도련님 시계탑'이 있어 매시 정각이면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기계장치극이 펼쳐지는데 아이부터 어른까지 관람객이 웃음 짓는 명물이다. 도고온천이라는 브랜드는 문학 속 캐릭터를 활용한 지역 마케팅에도 능하다. 실제로 '도련님 열차'라는 복고풍 관광 트램이 시내를 누비고 있고 '도련님 맥주', '도련님 라무네' 등 재미있는 지역 상품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도고온천 홈페이지에 소개된 건물 구조 ⓒ 도고온천
🎨 온천과 예술이 만나는 마을
도고온천은 최근 몇 년 사이 온천에 예술을 결합하는 새로운 실험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도고온천 아트'라는 이름의 지역 프로젝트를 통해 마을 곳곳에는 현대미술 작품이 설치되었다. 예술가들은 온천과 인간, 치유의 시간을 주제로 한 공공작품들을 상점가, 호텔, 심지어 족욕탕 근처에까지 배치하며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작품은 유명 설치미술가 미야지마 타쓰오가 만든 '시간의 족욕탕'. 온천수 위에 디지털 숫자가 흐르는 이 족욕탕은 전통적 치유 공간과 현대적 시간 개념이 맞물리는 신선한 체험을 제공한다. 여행자가 발을 담그는 순간, 온천은 단순한 힐링의 공간을 넘어 감각과 사유가 교차하는 예술 무대가 된다.
도고온천본관 대욕장 모습 @ 도고온천
🏞️ 과거와 현재가 욕탕에서 만날 때
도고온천은 일본 근대의 문턱, 예술과 대중문화의 교차점, 전통과 현대가 나란히 앉아 김을 내뿜는 공간이다. 기온이 높아지는 여름에는 야외 족욕탕에서, 겨울엔 김 서린 욕탕 안에서, 방문객들은 시간 여행자가 되어 고요한 감각에 몸을 맡긴다. 한 번쯤은 우리가 익히 아는 '일본의 온천'이라는 이미지를 넘어 일본인들이 왜 이곳을 마음의 고향이라 부르는지 직접 느껴볼 만한 공간이다. 최근에는 지역 예술가들이 참여한 공공예술 프로젝트와 디자인 호텔들이 들어서면서 레트로 감성+현대 감각이 공존하는 도시재생의 모델로도 주목받고 있다. 수천년의 온천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움직이는지를 지켜보는 일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문화 탐방이다.